[이영광의 이슈 돋보기] 신지영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신지영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신지영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2008년 초 대통령직 인수위는 갑자기 대통령 당선자가 아닌 당선인으로 불러 달라는 요구를 했다. 유권자, 수상자 등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없는데 왜 당선자는 당선인으로 해야 되는 걸까? 그러나 언론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당선자가 아닌 당선인이라고 불렀다. 언론이 누구의 심기를 살피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난 9월 언어학자인 신지영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는 <언어의 높이뛰기>라는 신간을 출간했다. ‘신지영 교수의 언어 감수성 향상 프로젝트’란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나이로 인한 차별과 무의식적으로 쓰는 일상용어의 언어의 감수성에 대한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책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 지난 18일 신지영 교수를 전주의 한 커피숖에서 만났다. 다음은 신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했다.

- 지난 9월 초 <언어의 높이뛰기>라는 책을 출간하셨잖아요, <언어의 줄다리기> 이후 3년만인데 소회가 어떠세요?
“오래 걸렸는데 그래도 새로운 책이 나와서 너무 기쁘고요. 1~2년에 한 번씩 책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3년 만에라도 나와서 다행입니다(웃음).”

- 부제가 ‘신지영 교수의 언어 감수성 향상 프로젝트’예요, 언어 감수성이 뭔지부터 설명해주세요.
“언어 감수성이란 게 언어에 대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거인데요. 언어라는 게 익숙하다 보니까 민감해질 수가 없거든요. 언어는 습관 같은 거로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습관이 있을 때 ‘그런 습관이 왜 생겼어?’라면 말하면 모르잖아요. 언어도 배우면 습관처럼 굳어지니까 우리가 쓰는 데 불편함이 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감수성을 갖기가 되게 어렵거든요.”

- 그럼 왜 언어에 감수성을 가져야 하나요?
“왜 언어의 감수성을 가져야 하냐면 언어는 내 것이 아니라 내 말을 듣는 사람 것이거든요. 내가 하는 말은 결국 들리기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그럼 잘 들리려면 그 사람의 감수성으로 말해야죠. 하지만 ‘내 말이 어떻게 들릴까’란 질문들을 평소에 하지 않다 보니 아무 말이나 막 하게 되는 건데 만약에 그게 어떻게 들를까를 고민하게 된다면 더 좋은 말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고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 거죠.”

- 그럼 감수성을 높인다면 막말도 줄어들겠네요?
“언어라는 게 들리는 사람을 위한 거죠. 우리가 막말 듣기 싫은 이유는 나에게 향하는 건데 나를 막 대하는 말을 하는 거니까 기분이 나쁜 거잖아요. 근데 막말이란 걸 알면서 했다면 그건 상대를 깔보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겠죠. 근데 만약 막말인지 모르고 말하는 사람은 무지한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 말을 들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 <언어의 높이뛰기>란 첵을 출간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언어의 줄다리기>를 어떤 분이 보고 작년 여름즈음 모기업에 있는 연구소에서 ‘언어의 줄다리기’ 강연을 좀 기획해 보자고 해서 만났어요. 근데 <언어의 줄다리기>는 좀 됐으니까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원래는 10개 강연으로 기획 했는데 <언어의 줄다리기>에 없던 내용들을 기획해서 13개 정도를 다시 만들었어요. 그 강연을 기획해서 만들고 있는데 인플루엔셜이라는 출판사에서 저에게 새로운 책을 한번 내보실 의향은 없느냐고 제안이 왔어요. 그러면서 출판 계획서 같은 걸 보내 주셨는데 그 내용도 되게 재미있는 내용이긴 했는데 저는 그거보다는 <언어의 줄다리기>처럼 그런 언어의 감수성과 관련 되는 거를 좀 쓰고 싶다고 역으로 제안했어요. 그랬더니 인플루엔셜 쪽에서 좋은 내용인 것 같고 한번 같이 책을 내보자고 하셨죠, 그래서 이번에 책을 내게 된 겁니다.”

- 첫 장이 나이가 권력이라는 얘기잖아요. 왜 나이 얘기를 시작 하셨나요?
“<언어의 줄다리기> 때는 성차별을 주로 썼거든요. 그러다 보니 차별 중에서도 내가 다루지 못했던 차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일상적이지만 우리가 잘 인식 하지 못 했던 게 높임말 때문에 나타나는 연령차별이 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했고 관련된 연구를 하게 됐어요. 박승빈이라는 분이 100년 전에 ‘존댓말 반말을 없애고 존댓말로 통일하자'고 했어요. 그 당시는 평등이 이슈였으니까 말의 평등을 통해서 세상의 평등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하셨던 글도 보고 그 시대 천도교 쪽도 같이 연구하면서 방정환, 김기전 선생님들의 글을 읽으면서 이 언어가 가지고 있는 연령 차별적인 요소에 대해 주목하게 된 거죠.
우리가 반말 존댓말 가지다 보니까 말이 불편해져서 세대 간 소통도 안 되는 부분들이 상당히 있거든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 한번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자는 거예요. 너무 습관적으로 우리는 나이 많은 사람한테 당연히 존댓말을 쓰고 나이 어린 사람한테 당연히 반말를 쓴다라고 생각하지만 당연히라는 건 없거든요. 거기 한번 질문을 던져 보자고 생각해서 제일 먼저 1장에 배치했습니다.”

- 그럼 왜 어른에겐 존댓말 하고 어린 사람에겐 반말을 하게 됐을까요?
“우리가 계속 보편적으로 평등을 지향하는 나라가 된 게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잖아요. 갑오개혁 이후에 신분제가 없어졌거든요. 신분제 이전에는 사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고 나이 어린 사람한테 반말을 쓴 게 아니라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는 존댓말을 쓰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는 반말 썼거든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신분제라는 세계관이 말을 선택하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어요. 근데 신분제가 없어지면서 그게 나이가 된 거죠.”

- 그럼 반말하는 사람들은 자기 아랫사람으로 생각하는 걸까요?
”맞습니다. 우리가 보통 높임법을 설명할 때 나보다 윗사람에게는 높임말을 써주고 나하고 같거나 아랫사람에게는 반말 쓴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사람에는 위아래가 없는데 우리가 이미 높임말을 설명하며 위아래를 전제하잖아요. 이런 문제를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해 보자는 거죠. 이건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언어가 담지 못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생각은 사람과는 모두 다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언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면 말을 바꿔야죠.“

- 아메리카노가 나오시는 나라란 쳅터 재밌더라고요. 쓰는 사람도 그게 잘못된 걸 아는 데 그걸 안 쓰면 손님이 불쾌해 하니 어쩔 수 없이 쓴다는 건데 결국 이건 손님의 갑질인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래서 혹시 우리가 돈을 주고 아메리카노를 사는 것에 대해서 갑질할 권리를 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해요. 그리고 사실은 ‘손님은 왕이다’란 말도 이제는 철 지난 거죠, 일단 우리는 왕조 사회가 아니고 손님은 왕이 아니라 손님인 거죠. 손님에게 우리가 공손하게 대해야 되는 건 사실이지만 손님도 그 물건을 파는 사람들에게 예의를 지켜야죠. 손님이 그냥 자기가 손님이라고 물건을 파는 사람한테 반말 한다든지 하는 것도 사실 돌이켜 봐야 될 거란 거죠. 이게 결국은 우리가 그런 것들 때문에 손님이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란 말에 만족 못 하고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라는 이상한 말을 요구하는 건 아닐지 또 그 손님 중에 하나가 우리는 아닐지란 것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게 아메리카노가 나오시는 나라에서 고민해 보자는 거였었어요.”

- 손님은 왕이라는 말 많이 쓰잖아요, 그 말은 왜 나왔을까요?
“옛날에는 그런 서비스라는 문화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까 그때 가장 편하게 사람들한테 익숙하게 다가올 수 있는 뭐라고 할까 가장 권력이 센 사람이 왕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손님은 왕이다. 그러니까 손님을 왕처럼 대접하자. 그게 서비스 정신이다’ 이렇게 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생각했겠죠. 그런데 마치 우리나라도 신분제 사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뭘 하다 보면 ‘나는 왕이야’ 이렇게 말을 하잖아요. 절대권력자야 이렇게요.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죠. 손님도 왕이다라는 건 우리가 쉬운 비유죠. 즉 손님한테 잘해 드리라고 얘기하는 거보다 ‘손님은 왕이야’라면 전달 되니까요. 하지만 왕이라고 잘못 생각해서 오히려 갑질 하는 게 아닌지 폭정 하는 건 아닌지를 생각해야 될 단계인 것 같아요. 이게 저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진보한 거다고 이것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가족 간 호칭 문제도 나와요. 이건 계속 나오는 문제잖아요. 교수님은 가족 간 호칭 문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세요?
“호칭은 부르는 말이니까 내가 내 입으로 저 사람과의 관계를 내가 부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굉장히 미묘한 말일 수 있어요. 그러니 내가 누구를 뭐라고 부르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를 고백해야 돼요. 근데 만약에 내가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다면 갈등이 생기는 거죠. 가족 호칭 문제에서 가장 많이 문제가 되고 있는 여러 가지 중에 하나가 아가씨 도련님 등 아주 오래된 호칭 문제로 불편해하는 내용이거든요. 아가씨 도련님 호칭은 반드시 ‘아가씨 뭐 해요’, ‘하세요’ 존댓말을 가져옵니다 도련님도 마찬가지고요. 한 사람은 결혼 해서 배우자의 동생들한테 아가씨 도련님 하면서 존댓말을 쓰고 왜 한 사람은 결혼을 해서 그 배우자의 동생들을 대상으로 해서 처남 처제로 부르며 반발 쓸까죠. 둘 다 존댓말 쓴다거나 둘 다 반말 쓰면 괜찮은데 왜 한 쪽만 요구당하는지 이 문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 당선자와 당선인에 대한 얘기도 나와요, ‘당선인’이란 표현은 헌법에도 위배된다면서요?
“맞습니다. 당선자라는 말이 헌법에 있어요. 그러니까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대통령 당선자라고 부르는 게 맞아요.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 인수위원회 때 첫 번째 언론 요청사항이 뭐냐면 당선자가 아니라 당선인으로 불러 달라고 얘기합니다. 그럼 왜 인으로 불러 달라고 했냐면 ‘자’자가 ‘놈 자’라 싫다는 거예요. 그런데 헌법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 헌법에 위배되는 요구를 하는 것이고 더 중요한 건 그 ‘놈 자’ 자의 놈이 옛날에 15세기에는 평칭이었단 말이죠. 비칭이 아니었어요. 그러다가 언어가 변하면서 ‘놈’은 비칭이 된 거죠. 훈민정음 언해에 보면 그 세종대왕의 서문이 번역되어 있잖아요. 언해본이라는 게 있어서 배웠죠. 거기 ‘시러 펴디 몯 할 놈이 하니라’라는 말이 있어요. 능히 자기가 원하는 표현을 다 못 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예요. 거기에 놈이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그게 백성의 일관적인 평칭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놈 자로 우리가 새김을 배우다 보니까 이게 지금까지도 와 가지고 놈 자 비칭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저는 학자잖아요. 그러면 기자도 마찬가지고요, 그 ‘자’자 때문에 불편하지 않잖아요. 그 ‘자’ 자는 그러니까 이제 그 당선자를 당선인은 바꿀 게 아니라 이 ‘놈 자’를 ‘사람 자’로 바꿔야 되는 거죠. 그러면 문제가 없어지는 거죠.”

- 너무 언론이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 아닌가요?
“사실 거기서 제일 큰 초점은 지금 기자님 말씀하신 부분이에요. 무리한 요청을 할 수 있겠죠. 그러면 사실은 기자들은 그걸 열심히 과연 받아들일 건지 받아들일 요청 사안이 아닌지를 선택할 수 있어야 되죠.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그냥 대통령인수위원회에서 얘기를 하니까 바로 바꿔 버리는 거예요. 사실 많은 사람이 차별이나 이런 거에 대항 해서 언론에 요구했던 게 많거든요. 예를 들면 아주 대표적인 게 미망인이라는 단어 쓰지 말자고 했죠. 근데 그게 완전히 없어진 건 사실 2010년대거든요. 언론에 계속 3, 40년동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 주지 않았던 그 언론이 당선자를 당선인으로 바꿔 달라고 하니까 확 바뀌는 모습 그러니까 얼마나 권력자의 심기를 살피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게 그 장의 취지였습니다.”

- 코로나 시대 언어에 대해서도 나오던데 우리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어가 있는데도 그걸 안 쓰고 전문가들만 아는 용어를 남발하는 건 우월 의식 때문 아닐까요?
“정확하게 보셨어요. 기사는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쓴 거죠. 그러면 그 사람들이 잘 읽힐 수 있도록 써야 하는데 내가 좀 더 많이 아는 것을 드러내려고 쓰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내가 전문가랑 의사소통을 해서 전문가가 내가 모르는 말을 하면 그거를 다시 물어서 내 말로 바꿔서 그다음에 시민들한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말로 바꿔 줘야 되는 게 기자의 몫인데 오히려 기자가 전문가를 따라서 그 말을 막 학습한 다음에 그거를 시민들한테 자기가 했던 거를 드러내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시민들이 알아듣지 못 하는 말을 하면 그러면 더 공포스럽게 감염병이 오지 않을까 그게 이제 코로나19의 언어 풍경에서 제가 했던 얘기입니다.”

- 언어 감수성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은 언어에 대해서 자꾸 자각하는 게 필요하죠. 우리가 어떤 말이 불편해요. 이러면 사람들은 ‘내가 익숙하게 그냥 배워서 쓰는 건데 왜 자꾸 불편하다고 하지?’라면서 화를 내거나 이렇게 수용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하는데 이때 잘 생각해 보자는 거죠. 내 말은 저 사람에게 들리기 위해서 하는 건데 저 사람이 불편하다면 왜 불편하다고 생각하는지를 생각해야죠. 그게 감수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의 감수성으로 말을 해야 이게 잘 들릴 거잖아요. 그러니까 불편을 호소하는 사람한테 ‘너 왜 자꾸 내 말을 불편하게 생각해?’ 그게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 ‘왜 내 말이 불편하게 들렀을까’라고 생각해 보는 게 성숙한 자세가 아닐까 하죠. 그러니까 불편하다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귀를 열고 이게 왜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를 꼼꼼하게 따져 보는 거 자세가 결국은 자신의 감수성을 높여 주는 거고 자신을 더 자기가 원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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